웨이샤오란 韦绍兰

웨이샤오란 韦绍兰

웨이샤오란 韦绍兰

중국 광시에서 태어남, 1944년 24세에 3개월간 동원됨

나의 뱃속에는 일본 병사의 아이가

임신 되어 있었고, 태어났어요.

시어머니는 부정하다며 태어나면 죽이려고 했지만,

아들로 태어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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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마을에 들어올 때는 이미 결혼도 하였고, 한 살 된 딸도 있었어요. 일본군 눈에 띄어 업고 있던 딸과 함께 잡혔어요. 4명의 다른 여자들과 군 트럭에 강제적으로 태워졌어요. 

그중 2명의 여자는 저항을 하다가 총에 맞아 죽었어요. 나는 딸이 걱정이 되어 그냥 트럭에 탈 수밖에 없었어요. 

처음 성폭행을 당했을 때를 잊을 수가 없어요. 일본군은 업고 있던 아이를 땅에 내려놓고, 그 짓을 하는 사이 아이가 울어도 관심이 없었어요. 

아이에게 해코지를 할까 봐, 죽임을 당할까 봐 거부하지 못하고 당했어요. 하루에 4-5명의 군인이 찾아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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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쯤 지나고 한밤 중에 자고 있는 아이를 업고 도망쳐 나왔어요. 집에 돌아온 나를 아버지는 너의 잘못이 아니니까 스스로를 원망하지 말라고 했어요. 

딸은 배가 아팠지만, 돈이 없어 병원에 갈 수 없었고, 3개월 만에 아이는 죽었어요. 그리고 나의 뱃속에는 일본 병사의 아이가 임신 되어 있었고, 태어났어요.

시어머니는 부정하다며 태어나면 죽이려고 했지만, 아들로 태어나자 커서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살려 주었어요. 

 

* 마을 사람들은 아들 루오산슈에罗善学 씨가 일본군을 닮았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를 들어 두 모자를 천시한다.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고, 모자는 동네 허드렛일을 하며 산다. 지금도 그의 친척들은 그들을 천시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이다.

이수단 LEE Su-dan

이수단 LEE Su-dan

이수단

LEE Su-dan

조선 평안남도에서 태어남, 1940년 19세에 5년간 동원됨, 중국 동닝에 남겨짐

나는 돈도 주고, 옷도 주고 만주에서

허드렛 일을 하는 줄만 알았어요.

3년 계약으로 선금 480원을 받아

의붓 어머니에게 주고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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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데려간 것은 일본군의 앞잡이였어요. 군복을 입고 칼을 차고 있었어요. 나는 돈도 주고, 옷도 주고 만주에서 허드렛 일을 하는 줄만 알았어요. 3년 계약으로 선금 480원을 받아 의붓 어머니에게 주고 왔어요. 

만주에 도착해 보니 공장이 아니라 유곽 같은 곳이었어요. 주인은 일본인 부부였고, 나를 히도미ひどみ라고 불렀어요. 

하루에 8-10명의 군인이 왔어요. 낮에는 일반 군인이 왔고 밤에는 장교들이 와서 자고 갔어요. 군인들이 주인에게 입장표를 사면 콘돔도 같이 받아 왔어요.

일본 군부대에서 군의관이 성병 검사를 했는데, 그만 큰병(성병)에 걸렸어요. 동닝东宁의 병원에 가서 10일 동안 치료를 받았어요. 퇴원해서 돌아왔는데, 내 방문 앞에 출입금지 표시를 해 두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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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에 들어간 돈도 내 몫이고, 일 못 한 돈도 빚으로 남았어요.

전쟁이 끝나고 해방이 됐지만, 고향에 마음을 붙이지 못할 것 같아 돌아가지 않았어요. 이 근처에서 중국인 남편을 만나 살았어요.

폭력이 심해 마을에서도 이혼하라고 할 정도였어요. 도저히 살 수가 없어 나중에는 혼자 경로원에 들어왔어요.

* 자신의 아이를 낳지 못한 할머니는 나이가 들수록 아이에 대한 집착이 커졌다. 정신분열증이 생기면서 아이 사진을 방에 붙여 두었다. 그리고 경로원장이 선물한 인형을 아기처럼 생각하며 얘기를 나누고, 잘 때도 안고 잤다. 

마르티나 Martina Madeira Hoar

마르티나 Martina Madeira Hoar

마르티나

Martina Madeira Hoar

동티모르 카사바우크에서 태어남, 1942년 12세에 3년간 동원됨

난 12살쯤이었는데,

끌려간 곳에는 어린 여자들이 많았어요.

난 일본군의 와이프였어요.

매일 많은 군인이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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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은 농사를 지었어요. 혼자 집에 있는데 일본군이 왔어요. 나는 무서워서 도망쳤어요. 그 사이 부모님은 돌아왔고 부모님을 잡았어요. 

난 12살쯤이었는데, 끌려간 곳에는 어린 여자들이 많았어요. 난 일본군의 와이프였어요. 매일 많은 군인이 왔어요.

나를 데려가겠다고 협박을 하고는 그대로 끌고 갔어요.군인은 밥도 안 줬어요. 

집에 돌아온 이후에는 가끔 일본군이 와서 나를 내 달라고 했어요. 부모님이 거절하자 마구 때리고 데려갔어요. 부모님을 때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했어요. 

의사는 없었어요. 아프면 치료도 약도 안 주고, 밥만 주었어요. 2년 뒤 전쟁이 끝나고 풀어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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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언제 갔는지 몰라요. 나중에 끌려간 것을 알았어요. 아빠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곳에 살고 있었어요. 나중에 만나서 같이 살고 나서야 언니한테 얘기를 들었어요. 결혼을 했지만 아이는 없어요. 

당시 일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요. 허리가 아프고 기침이 많이 나요. 낡은 집을 고쳤으면 좋겠어요. 

 

* 1975년도 언니를 만나 친척집에 같이 살고 있다. 할머니는 다른 가족들 앞에서 과거 얘기를 하기를 꺼린다. 자신의 아픔을 낯선 외국인에게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힘 들었는지, 일본군에게 당한 것을 와이프라고 완곡하게 표현한다. 

티자 Dg Tija

티자 Dg Tija

티자 Dg Tija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에서 태어남, 1945년 16세(추정)에 5개월간 동원됨

만약 아버지가 알게 된다면 죽임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여기 Gowa문화는 어떤 여자가 그런 일을 당하면 죽어야만 했어요.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이 사실을 몰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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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학년 정도에 일본군이 우중판당Ujung Pandang으로 들어왔어요. 처음에 아버지가 잡혀갔고, 10일 뒤에 아버지가 모르는 상황에서 나도 4명의 일본군에게 잡혀 갔어요.

거기에는 10명 정도 다른 여자도 있었어요. 보통 하루에 3명의 군인에게 성폭행을 당했어요. 추가적으로 2명이 더 올 때도 있었어요.

그런 일을 당하고 나니까 너무나 당황스러웠어요. 울면서 집에 가고 싶다고 했으나 갈 수가 없어 울면서도 당했어요. 반항을 할 때는 나무에 손을 줄로 묶었어요.

거기에 있는 동안 성기에서 피가 났지만, 아무런 치료도 약도 없었어요. 일본군은 성관계 후 이상한 약을 주었어요. 임신이 안 되는 약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곳에서 죽는 여자도 있었어요. 한 친구가 아프고 나서 집에 돌아 가서, 일주일 후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힘이 빠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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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월 있다가 일본군이 돌아 갔어요. 집으로 돌아온 이후 아버지에게 그 일을 얘기 안 했어요.

만약 아버지가 알게 된다면 죽임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여기 Gowa문화는 어떤 여자가 그런 일을 당하면 죽어야만 했어요.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이 사실을 몰랐어요.

숨도 잘 안 쉬어지고, 앉았다 일어나면 다 아파요. 너무 아프면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약을 먹으면 좋아져요. 약을 계속해서 먹고 싶어요.

* 집이 오래돼서 한쪽으로 쓰러져 가고 있다. 여러 명의 자식이 있는데, 다섯째 딸 Salla씨와 살고 있다.

루시아 Lucia Luriz

루시아 Lucia Luriz

루시아 Lucia Luriz

필리핀 아라얏에서 태어남, 1942년 12세에 2개월간 동원됨

텔레비전에서 일본말이 들릴 때는

악몽에 빠져요.

일본 정부는 전쟁 중에 일어난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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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빨래한 옷을 널고 있었는데, 일본군 3 명이 와서 양쪽 팔을 잡았어요. 일본말로 소리를 질렀기 때문에 알아 들을 수 없어 나는 두려웠어요.

강제적으로 끌려서 Arayat central school로 갔어요. 나는 방안에 혼자 갇혔어요. 좀 있다가 언니 Maria도 잡혀 왔어요. 방에 2명의 군인이 들어왔고,

나는 방안에서 군인을 피해 이리 저리 피했지만 잡혀서 맞았어요. 첫 번째 군인이 나를 성폭행할 때 심하게 피를 흘렸고 고통스러웠어요. 다음 군인이 할 때는 의식을 잃었어요.

깨어나니까 옷이 피에 젖어 있었어요. 동생 Valeriana도 잡혀와 한방에 있었는데, 같은 고통을 겪은 것처럼 보였어요. 다음 날에도 군인이 왔어요.

나의 몸은 아직 부어 있었어요. 군인은 상관하지 않았어요. 낮에는 청소를 하고, 밤에는 일주일에 3-4번씩 성폭행을 당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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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할 때 남편에게 이야기 했어요. 그는 나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어요.

가끔 텔레비전에서 일본말이 들릴 때는 악몽에 빠져요. 성폭행, 정서적, 신체적 손해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어요. 일본 정부는 전쟁 중에 일어난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해요.

* 어두운 계단 반 층을 오른 할머니의 방 한쪽에는 기도를 하기 위한 십자가와 예수상이 있다. 큰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받으며 기도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아름다웠지만, 가슴이 메어져 왔다.

런란어 任兰娥

런란어 任兰娥

런란어 任兰娥

중국 산시에서 태어남, 1944년 13세(추정)에 15일간, 2달동안 동원됨

나는 이 일이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중국 정부도 문제예요.

내가 겪은 일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에요.

창피해서 말하고 싶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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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사촌 오빠가 팔로군이었어요. 매국노가 밀고 하는 바람에 일본군이 집으로 왔어요. 사촌 오빠 머리에 불을 질렀고, 엄마와 나는 일본군에게 무릎을 꿇고 학대하지 말라고 애원을 했어요.

일본군은 되려 나를 방안으로 끌고 가 강간을 하였고, 난꺼우춘南沟村으로 끌고 갔어요.

그곳에는 두 명의 여자가 같이 있었어요.

한 여자는 반항을 하다가 칼에 찔려 죽고, 또 한 여자는 그 충격에 정신병이 생겼어요. 혼자 남게 된 나는 매일 10명이 넘는 군인에게 성폭행을 당했어요.

가족들이 매국노에게 돈과 먹을 것을 주고 나서야 겨우 풀려 났어요.
두 번째로 끌려갈 때에는 10명의 여자가 있었어요. 그때는 팔로군이 일본군 거점을 공격할 때 혼란스런 틈을 타 도망 나왔어요. 풀려난 이후에는 마을에 일본군이 올 때마다 다락방 같은 곳에 숨어 지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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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일이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중국 정부도 문제예요. 내가 겪은 일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에요. 창피해서 말하고 싶지 않아요.

예전에 누가 옷과 선물을 가져다 주는 경우가 몇 번 있었는데, 이웃들이 선물을 주고 간 이유에 대해서 물었을 때, 거짓으로 얘기했어요.

* 2013년에 죽은 적이 있는데, 수의를 입은 뒤, 한 시간만에 스스로 눈을 떴다고 한다. 할머니는 한동안 말을 잊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 번 죽었기 때문에 스스로 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박차순 PARK Cha-soon

박차순 PARK Cha-soon

박차순

PARK Cha-soon

조선 전라북도에서 태어남, 1942년 19세에 3년간 동원됨, 중국 후베이성에 남겨짐

군인과 여자는 많은데 방이 모자라

가운데를 천으로 가리고,

양쪽에서 일본군을 상대했어요.

평상시에는 계급이 있는 군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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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형편이 어려워 전주 인근에서 외 조부모 밑에서 컸어요. 술을 떠서 파는 집에서 낮은 임금으로 일을 하다가 주인에게 빚이 생겨 경성의 매춘굴에 팔려갔어요. 거기서 다시 중국 위안소로 팔려갔어요. 난징南京을 거쳐 우한武汉의 우창武昌으로 왔어요.

군인과 여자는 많은데 방이 모자라 가운데를 천으로 가리고, 양쪽에서 일본군을 상대했어요. 평상시에는 계급이 있는 군인이, 일요일에는 사병 20여 명을 받았어요. 일본인 관리자가 모두 물품을 배급했어요.

전쟁이 끝나고 일본 조계지 근처로 여자들을 집결시켰어요.

나는 무서웠고 현지인 도움으로 도망을 쳤어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몰랐어요. 부모님도 안 계시고 이곳 생활이 부끄럽다고 생각해 남기로 했어요.

샤오간孝感에 살면서 결혼했지만 아이를 가질 수 없었어요. 어린 여자 아이를 입양해 키웠어요. 그 시절의 아픔 때문인지 1970년도에는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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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양딸이 있지만 할머니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천장도 없는 창고에 사는 할머니에게 방을 만들어 주기 위해 한국, 일본, 중국에서 23명의 지원자와 65명의 후원자가 힘을 모아 제대로 된 방을 만들어 드렸다. 겨울을 따뜻하게 난다며 너무 고마워하시는 모습에 기뻤다.

프란시스카 Fransisca Marcedu

프란시스카 Fransisca Marcedu

프란시스카

Fransisca Marcedu

동티모르 수아이에서 태어남, 1942년 13세(추정)에 3년간 동원됨

일본군들은 나를 토미코トミコ라고 불렀어요.

매일 돈도 약도 안 주었어요.

나는 말과 개와 똑같았어요.

내가 하는 말은 진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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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인지 모르지만, 일본군이 와서 부모님에게 나를 달라고 했어요. 나는 가기 싫다고 했지만, 일본군은 강제적으로 나를 끌고 갔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군인들이 계속 바뀌면서 왔어요. 한 명이 끝나면 또 한 명이 계속해서 들어왔어요. 일본군은 그 짓을 하지 않으면 부모님을 죽이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일본군들은 나를 토미코トミコ라고 불렀어요. 

매일 돈도 약도 안 주었어요. 나는 말과 개와 똑같았어요. 내가 하는 말은 진짜예요. 밥도 쌀이 아니라 옥수수 먹었어요. 다른 친구 Dafumako, Dou 과 함께 3명이 같이 있었어요.

가기 전에는 생리가 없었는데, 1년이 지나니까 생리가 시작되었어요. 그곳에서 3년 정도 있었어요. 일본군이 집으로 돌아가서 나도 돌아 올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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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생각을 하면 머리가 계속 아파요. 팔, 다리에 문신은 일본군이 했어요. 위안소에 같이 있을 때 먼저 문신을 만들자고 했어요. 뭐라고 썼는지는 기억이 안 나요.(글씨는 흐릿해졌고, 문양만 보인다.)

* 2014년만 해도 얘기도 나누던 할머니가 이제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은 대화가 거의 불가능하다. 누구의 부축이 없이는 방안을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할머니는 항상 커다란 가죽처럼 보이는 가방을 보물처럼 여기며 다닌다. 할머니에게 필요한 머리빗, 빈랑 등이 들어 있다.

다이 Dayi

다이 Dayi

다이 Dayi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에서 태어남, 1945년 20세(추정)에 6개월간 동원됨

꼭 인사를 해야 했어요.

ごんにちわ, さよなら(안녕하세요, 안녕히계세요)’

인사를 하지 않으면,

화를 냈지만 때리지는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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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은 농사를 지었고, 10명의 형제 자매와 행복하게 지냈어요.

마을 촌장이 와서 일본군이 시켰다며 마을 여자 12명을 강제적으로 뽑아 일본군에게 보냈어요. 옷도 제대로 못 입은 상태에서 강제로 끌려 갔어요.

촌장은 솜으로 실을 만드는 일이라고 했어요. 그때 20살이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도 있었어요.

낮에는 솜으로 실을 만들었고, 저녁에는 일본군이 우리를 데려 갔어요. 거의 매일 밤 같은 군인이 와서 같이 잤어요. 그 군인은 만날 때마다 꼭 인사를 해야 했어요.

‘ごんにちわ, さよなら(안녕하세요, 안녕히계세요)’ 인사를 하지 않으면, 화를 냈지만 때리지는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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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일본군이랑 그 짓을 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갔어요. 나는 그때 생리는 했지만 임신은 하지 않았어요.

다른 친구들은 임신한 경우 있었어요. 그 친구들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사는 지는 모르겠어요.

* 거처할 마땅한 방이 없어 부엌 한쪽에 침대를 두고 생활한다. 2층 바닥은 대나무로 엮어져 있어 베일까 봐 위험해 보인다. 할머니는 인터뷰를 하는 동안 계속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나중에 안 얘기지만, 그 일본군이 나와 똑같이 생겼다고 한다. 통역자가 차마 그 앞에서 나에게 그 얘기를 할 수 없었다고 했다.

페덴시아 Fedencia Nacar David

페덴시아 Fedencia Nacar David

페덴시아

Fedencia Nacar David

필리핀 루손에서 태어남, 1942년 14세(추정)에 10일, 한달간 두번 동원됨

수시로 3-5명의 군인이 집으로 찾아와 나를 성폭행하고,

먹을 것을 빼앗아 갔어요.

아버지는 숨으러 갔었고,

나 혼자 집에 있었기 때문에 희망이 없는 상황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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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같이 마을 시장에 갔을 때, 일본군 2명에게 맞아서 쓰러졌고, 뒤쪽으로 손을 묶였어요. 저항하자 칼로 내 귀를 잘랐어요.

그리고 나를 잡아 갔어요. 관청의 방으로 끌려 갔는데, 일본군이 들어와 나를 안으려 했어요. 군인은 소리를 지르는 내 입을 막고 성폭행을 했어요. 그 뒤로도 군인들에게 당했어요. 다른 여자 10명 정도 있었어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군인들이 계속 찾아왔어요. 10일 정도 지나자 군인은 나더러 집으로 가라고 했어요. 우리를 게릴라 스파이로 알고, 미행을 하기 위해 일부로 풀어준 거예요. 다음날 집에 도착했을 때,

일본군은 무작정 총으로 할머니를 쏴 죽였어요. 그 와중에 일본군 2명은 나를 성폭행했어요. 정신을 잃었고 한참 뒤에 일어나 집으로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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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도 수시로 3-5명의 군인이 집으로 찾아와 나를 성폭행하고, 먹을 것을 빼앗아 갔어요. 아버지는 숨으러 갔었고, 나 혼자 집에 있었기 때문에 희망이 없는 상황이었어요.

한달이 지나서야 일본군은 더 이상 오지 않았어요. 정신적 외상으로 기억 상실증에 걸린 적도 있어요. 그때는 말도 하지 못했어요.

* 할머니는 살림에 보태기 위해 조각난 천을 구해다가, 한 손에 쥐기 좋은 크기로 미싱으로 박아 걸레를 만들어 판다. 하나에 1페소(30원 )불과하지만, 쉬는 것보다 낫다며 소일거리를 계속 찾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