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아이
카르민다 Carminda Dou
카르민다 Carminda Dou
카르민다
Carminda Dou
동티모르 틸로마르에서 태어남, 1942년 16세(추정)에 3년간 동원됨
갑자기 ‘一, 二, 三(1, 2, 3)’
일본 숫자를 발음하기 시작한다.
가족들은 계속 말해보라고 하지만,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구부러진 등허리, 왜소해 보이는 피해자의 나이는 90세가 넘어 보였다.
오래 전 부터 알츠하이머가 진행되어 당시의 기억은 물론 일상적인 대화조차 이어 나갈 수 없었다.
다행히도 같이 살고 있는 동생 Martina씨로부터 언니의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들을 수 있었다.
둘은 자매이지만, 어머니는 같고 아버지가 서로 달라 어린 시절 서로 다른 곳에서 자랐다.
일본군이 들어왔을 무렵 언니와 동생은 비슷한 시기에 둘 다 일본군에게 끌려 갔지만, 서로 소식을 몰랐다.
동생 말에 의하면, 일본군이 길을 만들면서 언니가 사는 곳까지 왔고, 언니를 강제적으로 잡아 갔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기 전 3년 동안 성노예를 당했다고 한다.
인터뷰 내내 동생 옆에 앉아 있는 언니는 미소만 지을 뿐이다. 중간에는 언니가 갑자기 ‘イチ、ニ、サン(1, 2, 3)’ 일본 숫자를 발음하기 시작한다. 가족들은 계속 말해보라고 하지만,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동생이 당시 일본군의 만행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미소를 짓던 언니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피해자는 이미 많은 기억을 잊었지만, 가슴속에 남아 있는 고통은 지울 수 없었다.
* 높은 문턱에 위치한 좁은 입구의 집은 내가 들어가기에도 힘들었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가 이 위험할 곳을 드나들다가 넘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사방이 막혀 빛이 제대로 들지 않지만, 방안에서 식사를 하고 쉬며 그렇게 생활을 한다.
라우린다 Laurinda Dapuhalek
라우린다 Laurinda Dapuhalek
라우린다
Laurinda Dapuhalek
동티모르 베코에서 태어남, 1942년 12세에 3년간 동원됨
일본군은 내 이름을 놔두고
나를 '타즈코Tazuko'라고 불렸어요.
밥은 주지만 돈은 주지 않았어요.
나는 내 나이를 정확히 기억 못해요. 어릴 때는 부모님하고 언니 2명이서 같이 살았어요. 어느 날 일본군이 길을 만들면서 우리 마을까지 들어왔어요.
총 싸움을 하면서 예쁘게 생긴 여자들은 다 잡았어요. 그때 12살 정도 였어요. 언니 2명은 결혼을 했기 때문에 잡아가지는 않았어요.
일은 시키지 않았어요. 군인은 많았지만 여자는 우리 둘뿐이었어요. 매일 많은 군인과 잤어요. 의사가 있어서 건강 검진을 했어요. 그때 큰 병은 안 걸렸고, 열이 나거나 아프면 약을 주었어요.
일본군은 내 팔에 문신을 새겨 넣었어요. ‘多鶴子’와 ‘JAPON…’을 새겼는데, 그때는 무엇인지 몰랐어요.
일본군은 내 이름을 놔두고 나를 'Tazuko'라고 불렸어요. 밥은 주지만 돈은 주지 않았어요.
전쟁이 끝나고 3년 만에 풀려 났어요. 그때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안 좋고 머리가 아파요.
일본의 높은 사람이 와서 직접 봐야 돼요.
옛날의 마음이 아파서 보상을 해주어야 돼요. 돈과 옷을 주었으면 좋겠어요.
* 딜리Dili에서 200킬로의 거리이지만, 차로 10시간을 넘게 달려서야 할머니 집에 도착을 했다. 높게 솟은 전통가옥 아래에 공간을 두어, 아래에는 돼지, 닭 같은 가축이 살고, 그 위에 할머니가 산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집안이 어둡기만 하다. 최근에는 다른 땅에 시멘트로 집을 만들기 위해 기초공사를 하고 있다.
마르티나 Martina Madeira Hoar
마르티나 Martina Madeira Hoar
마르티나
Martina Madeira Hoar
동티모르 카사바우크에서 태어남, 1942년 12세에 3년간 동원됨
난 12살쯤이었는데,
끌려간 곳에는 어린 여자들이 많았어요.
난 일본군의 와이프였어요.
매일 많은 군인이 왔어요.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어요. 혼자 집에 있는데 일본군이 왔어요. 나는 무서워서 도망쳤어요. 그 사이 부모님은 돌아왔고 부모님을 잡았어요.
난 12살쯤이었는데, 끌려간 곳에는 어린 여자들이 많았어요. 난 일본군의 와이프였어요. 매일 많은 군인이 왔어요.
나를 데려가겠다고 협박을 하고는 그대로 끌고 갔어요.군인은 밥도 안 줬어요.
집에 돌아온 이후에는 가끔 일본군이 와서 나를 내 달라고 했어요. 부모님이 거절하자 마구 때리고 데려갔어요. 부모님을 때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야만 했어요.
의사는 없었어요. 아프면 치료도 약도 안 주고, 밥만 주었어요. 2년 뒤 전쟁이 끝나고 풀어주었어요.
언니는 언제 갔는지 몰라요. 나중에 끌려간 것을 알았어요. 아빠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곳에 살고 있었어요. 나중에 만나서 같이 살고 나서야 언니한테 얘기를 들었어요. 결혼을 했지만 아이는 없어요.
당시 일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요. 허리가 아프고 기침이 많이 나요. 낡은 집을 고쳤으면 좋겠어요.
* 1975년도 언니를 만나 친척집에 같이 살고 있다. 할머니는 다른 가족들 앞에서 과거 얘기를 하기를 꺼린다. 자신의 아픔을 낯선 외국인에게 드러내는 것이 얼마나 힘 들었는지, 일본군에게 당한 것을 와이프라고 완곡하게 표현한다.
프란시스카 Fransisca Marcedu
프란시스카 Fransisca Marcedu
프란시스카
Fransisca Marcedu
동티모르 수아이에서 태어남, 1942년 13세(추정)에 3년간 동원됨
일본군들은 나를 토미코トミコ라고 불렀어요.
매일 돈도 약도 안 주었어요.
나는 말과 개와 똑같았어요.
내가 하는 말은 진짜예요.
언제인지 모르지만, 일본군이 와서 부모님에게 나를 달라고 했어요. 나는 가기 싫다고 했지만, 일본군은 강제적으로 나를 끌고 갔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군인들이 계속 바뀌면서 왔어요. 한 명이 끝나면 또 한 명이 계속해서 들어왔어요. 일본군은 그 짓을 하지 않으면 부모님을 죽이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일본군들은 나를 토미코トミコ라고 불렀어요.
매일 돈도 약도 안 주었어요. 나는 말과 개와 똑같았어요. 내가 하는 말은 진짜예요. 밥도 쌀이 아니라 옥수수 먹었어요. 다른 친구 Dafumako, Dou 과 함께 3명이 같이 있었어요.
가기 전에는 생리가 없었는데, 1년이 지나니까 생리가 시작되었어요. 그곳에서 3년 정도 있었어요. 일본군이 집으로 돌아가서 나도 돌아 올 수 있었어요.
당시 생각을 하면 머리가 계속 아파요. 팔, 다리에 문신은 일본군이 했어요. 위안소에 같이 있을 때 먼저 문신을 만들자고 했어요. 뭐라고 썼는지는 기억이 안 나요.(글씨는 흐릿해졌고, 문양만 보인다.)
* 2014년만 해도 얘기도 나누던 할머니가 이제는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은 대화가 거의 불가능하다. 누구의 부축이 없이는 방안을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 되었다. 할머니는 항상 커다란 가죽처럼 보이는 가방을 보물처럼 여기며 다닌다. 할머니에게 필요한 머리빗, 빈랑 등이 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