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단 LEE Su-dan

kr2_03_LEE Su-dan_010

조선 평안남도에서 태어남, 1940년 19세에 5년간 동원됨, 중국 닝에 남겨짐

나는 돈도 주고, 옷도 주고 만주에서

허드렛 일을 하는 줄만 알았어요.

3년 계약으로 선금 480원을 받아

의붓 어머니에게 주고 왔어요.

kr2_03_LEE Su-dan_027

나를 데려간 것은 일본군의 앞잡이였어요. 군복을 입고 칼을 차고 있었어요. 나는 돈도 주고, 옷도 주고 만주에서 허드렛 일을 하는 줄만 알았어요. 3년 계약으로 선금 480원을 받아 의붓 어머니에게 주고 왔어요. 

만주에 도착해 보니 공장이 아니라 유곽 같은 곳이었어요. 주인은 일본인 부부였고, 나를 히도미ひどみ라고 불렀어요. 

하루에 8-10명의 군인이 왔어요. 낮에는 일반 군인이 왔고 밤에는 장교들이 와서 자고 갔어요. 군인들이 주인에게 입장표를 사면 콘돔도 같이 받아 왔어요.

일본 군부대에서 군의관이 성병 검사를 했는데, 그만 큰병(성병)에 걸렸어요. 동닝东宁의 병원에 가서 10일 동안 치료를 받았어요. 퇴원해서 돌아왔는데, 내 방문 앞에 출입금지 표시를 해 두었어요. 

kr2_03_LEE Su-dan_023
kr2_03_LEE Su-dan_021

치료에 들어간 돈도 내 몫이고, 일 못 한 돈도 빚으로 남았어요.

전쟁이 끝나고 해방이 됐지만, 고향에 마음을 붙이지 못할 것 같아 돌아가지 않았어요. 이 근처에서 중국인 남편을 만나 살았어요.

폭력이 심해 마을에서도 이혼하라고 할 정도였어요. 도저히 살 수가 없어 나중에는 혼자 경로원에 들어왔어요.

* 자신의 아이를 낳지 못한 할머니는 나이가 들수록 아이에 대한 집착이 커졌다. 정신분열증이 생기면서 아이 사진을 방에 붙여 두었다. 그리고 경로원장이 선물한 인형을 아기처럼 생각하며 얘기를 나누고, 잘 때도 안고 잤다. 

박차순 PARK Cha-soon

kr2_02_PARK Cha-soon_010

조선 전라북도에서 태어남, 1942년 19세에 3년간 동원됨, 중국 후베이성에 남겨짐

군인과 여자는 많은데 방이 모자라 가운데를 천으로 가리고,

양쪽에서 일본군을 상대했어요. 평상시에는 계급이 있는 군인이,

일요일에는 사병 20여 명을 받았어요.

일본인 관리자가 모두 물품을 배급했어요.

kr2_02_PARK Cha-soon_026

가정형편이 어려워 전주 인근에서 외 조부모 밑에서 컸어요. 술을 떠서 파는 집에서 낮은 임금으로 일을 하다가 주인에게 빚이 생겨 경성의 매춘굴에 팔려갔어요. 거기서 다시 중국 위안소로 팔려갔어요. 난징南京을 거쳐 우한武汉의 우창武昌으로 왔어요.

군인과 여자는 많은데 방이 모자라 가운데를 천으로 가리고, 양쪽에서 일본군을 상대했어요. 평상시에는 계급이 있는 군인이, 일요일에는 사병 20여 명을 받았어요. 일본인 관리자가 모두 물품을 배급했어요.

전쟁이 끝나고 일본 조계지 근처로 여자들을 집결시켰어요.

나는 무서웠고 현지인 도움으로 도망을 쳤어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몰랐어요. 부모님도 안 계시고 이곳 생활이 부끄럽다고 생각해 남기로 했어요.

샤오간孝感에 살면서 결혼했지만 아이를 가질 수 없었어요. 어린 여자 아이를 입양해 키웠어요. 그 시절의 아픔 때문인지 1970년도에는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을 했어요.

kr2_02_PARK Cha-soon_022

* 수양딸이 있지만 할머니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천장도 없는 창고에 사는 할머니에게 방을 만들어 주기 위해 한국, 일본, 중국에서 23명의 지원자와 65명의 후원자가 힘을 모아 제대로 된 방을 만들어 드렸다. 겨울을 따뜻하게 난다며 너무 고마워하시는 모습에 기뻤다.

하상숙 HA Sang-sook

kr2_01_HA Sang-sook_010

조선 충청남도에서 태어남, 1944년 16세에 8개월간 동원됨, 중국에 남겨짐

먼저 군의관이 검사를 하고

아이를 못 갖는 주사를 놓아 주었어요.

처음 3명의 군인을 받고나서 오줌을 누는데

칼로 베는 듯 아팠어요.

어느 날 곱게 화장한 이웃집 언니가 왔어요. 일본 공장에서 돈을 번다고 했고, 이번에는 상하이上海 로 가는데 같이 가자고 했어요. 나는 좋다고 했어요. 며칠 있다가 남자 2 명이 찾아왔어요.

기차를 타고 경성(지금의 서울)으로 갔고, 다른 곳에서 온 40 명의 여자들과 다시 기차를 타고 단둥丹东을 거쳐 난징南京으로, 배를 타고 우한武汉으로 왔어요.

한커우汉口 지칭리积庆里에 도착 했을 때는 처음과 말이 달랐기 때문에 모든 것이 어리둥절했어요.

kr2_01_HA Sang-sook_023
kr2_01_HA Sang-sook_010

먼저 군의관이 검사를 하고 아이를 못 갖는 주사를 놓아 주었어요. 처음 3명의 군인을 받고나서 오줌을 누는데 칼로 베는 듯 아팠어요.

나는 2층 방에 있었는데, 1층에 사진을 걸어 두면 군인들이 골라서 방으로 들어 왔어요. 일요일에는 군인들이 밖에 줄을 서고 있었어요. 한 사람에 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넘으면 주인에게 혼났어요.

kr2_01_HA Sang-sook_026

전쟁이 끝나고 조선 사람들은 지칭리에 모였어요. 많은 여자들이 조선으로 돌아갔지만,

이 몸으로 돌아가서 뭐 할 거라는 생각에 가지 않았어요. 나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고, 아이 셋 딸린 중국 남자와 결혼해 살았어요.

* 2001년 처음 할머니를 만나러 우한에 갔었다. 내 바지가 책상 모서리에 걸려 찢어졌는데, 남자는 그렇게 다니면 안 된다며, 옷을 입은 채로 바늘로 바지를 꿰매 준 것을 잊을 수 없다. 2015년 할머니는 2층 계단에서 구르는 사고를 당해 한국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했지만, 2017년 8월에 돌아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