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초의 위안부 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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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사범대 역사학과 수즈량(蘇智良)교수는 상하이 소재 위안소 160곳을 밝혀낸 <상하이일본군위안소실록>을 발간하고, 교내에 중국 최초의 위안부역사관을 설립한 인물이다. 그가 처음 위안부 문제를 접한 것은 일본 도쿄대 연구원생 시절 일본의 국제회의에서 '첫번째 위안소가 상하이에 있다'고 들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상하이로 돌아와 1993년부터 무려 20년 가까이 위안부 연구에만 몰두해 온 그는 상하이에 위안부 관련 유적을 모으고 피해자 증언을 수집해 2007년 위안부 역사관을 개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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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들의 증언과 관련 서적이 주를 이루고 있는 역사관은 위안부가 사용했던 삿쿠(콘돔)와 머리빗, 신발 등의 유물 몇 점만 진열하고 있는 아주 작은 규모의 역사관이었다. 아직 채 백 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전 아시아를 대상으로 자행한 인권 유린과 폭력적인 만행이 이렇게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질 수 있는 것일까? 과거 청산 없는 현재와 미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본의 군국주의 미명하에 자행한 범죄를 기억하고, 더불어 진심 어린 사죄를 받아낼 때 진정한 용서와 화해가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내륙 진출을 위한 교두보, 우한 위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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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5월에 쉬저우(徐州)을 점령한 후 일본군은 우한삼진(한커우, 한양, 우창) 을 향했다. 우한에는 장제스(蒋介石)의 군사 지휘부가 있었고, 사방으로 통하는 교통의 중심이기도 했다. 6월에 일본군은 셋 방향으로부터 우한에 공격을 시작했지만 중국군의 끈질긴 반격으로 고전한다. 드디어 10월말에 점령했다. 일본에서 우한작전이라고 불리는 이 싸움은 중일전쟁 중에서도 최대규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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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이 층짜리 가옥이 나란히 있는 지칭리(積慶里) 지역을 확보하여 위안소로 사용했다. 이곳은 1938년 11월부터 패전까지 사용되어 주로 일본인과 조선인 여성이 있었다. 또한 근처에 있던 육합리(六合里)라는 지역은 중국인 여성들이 피해를 받았던 장소다. 적경리는 ‘30건의 업주, 300명의 위안부 집단’을 일본군이 관리하여, ‘그 규모와 내용에 있어 중국파견군 최대’ (나가사와 켄이치, 1983, 『한코우위안소』, 62쪽) 였다고 한다.

하상숙 피해자가 처음간 곳은 우한의 지칭리이다. 골목은 쇠창살로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고, 입구에서 세 번째 집인 `삼성루`위안소에서 `기미코`이름으로 위안부 생활을 했다. 처음 군의관의 검사를 받으며 주사를 맞았는데, 그냥 아이를 못 갖게 하는 주사라고만 알려주었다. 군인들이 몰려 올 때에는 15명을 받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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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커우 일본 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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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중국에 있었던 5곳의 일본조계(天津, 重慶, 蘇州, 杭州) 중 하나로, 1937년 당시 1984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1938년 상해사변 1주년기념일에 중국정부가 회수했으나 같은 해 10월25일 한커우가 일본군에 의해 함락됨에 따라 조계가 부활하였고 1943년3월30일에 친일정권인 왕정위 정권에 반환되었다.일본 조계는 외진 곳에 위치하였고 일본상인들의 경제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크게 번영하지 않았다. 일본 은행이나 기업들은 다 영국 조계에 자리잡고 있었고 일본 조계는 밀수나 마약밀매의 중심지가 되었다.

1944년12월18일에 미군의 폭격에 의해 전체가 폐허로 변했으나 몇몇 건물은 남았다. 신사 등 2003년에 철거된 건물도 있으나 현재, 長春街1-4호의 서양건축, 옛 일본영사관(山海関路2호), 일본조계군관숙사(勝利街272호)、팔로군우한변사처(長春街57호)、한커우新四軍軍部(勝利街332-352호, 당시 지명은 大和街26호) 등이다.

일본군 최초의 위안소 다이이치살롱(大一沙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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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하이 둥바오싱(東寶興)로 125롱(弄)에 위치한 일본군 최초의 위안소인 '다이이치살롱(大一沙龍)'. 이 곳은 1932년 1월28일 일본군이 중국 상하이를 무장 침범한 이른바 `1.28사변' 두 달 전 상하이 홍코우취(虹口)에 음식점으로 운영하던 곳을 개조하여 군이 직접 운영한 군위안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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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 조계지였던 홍코우취를 중심으로 일본군은 상하이뿐만 아니라 그들의 군대가 이동하는 곳마다 기하급수적으로 위안소를 설치하였는데, 지금은 급격하게 진행된 도시화로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현실에 비해 최초 위안소 다이이치 살롱의 건물은 비교적 잘 보존된 상태였다.
이미 80년도 더 지난 건물이기에 내부는 상당히 낡고 초라했다. 빛도 잘 들지 않을뿐더러 나무로 된 복도와 계단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건물 한 채에 무려 40여 가구가 사는 이른바 쪽방촌으로 전락한 이 곳에는 이제 더 이상 80여년 전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전해들은 이야기를 다시금 전해줄 뿐이다. 이제 이곳은 사람이 아닌 당시의 상황을 고스란히 목도했던 건물들이 과거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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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정문 입구에 일본황실을 상징하는 국화문양과, 방안 창틀에 새겨진 후지산 문양이 과거 일본군이 주둔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좁은 방들은 중일전쟁의 승리에 취한 일본군들이 술에 취해 휘청거리며 성적 욕구를 ‘배설’했던 곳이었음을 증명이나 하듯이 붉은 핏빛을 띠고 있다. 80년전 십대 소녀의 몸으로 낯설고 물설은 이곳에서 느꼈을 그녀들의 공포를 생각하니 가슴 한 켠이 한없이 먹먹해온다. 침략 야욕에 광분하여 전쟁을 일으킨 후 한반도를 병참 기지화 하고 젊은 남성들은 강제 징용을, 젊은 여성들은 위안부로 징발했던 우리역사의 아픈 상처는 이렇게 이국 땅 상하이에까지도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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