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단 LEE Su-dan의 사본

이수단 LEE Su-dan

이수단

LEE Su-dan

조선 평안남도에서 태어남, 1940년 19세에 5년간 동원됨, 중국 동닝에 남겨짐

나는 돈도 주고, 옷도 주고 만주에서

허드렛 일을 하는 줄만 알았어요.

3년 계약으로 선금 480원을 받아

의붓 어머니에게 주고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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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데려간 것은 일본군의 앞잡이였어요. 군복을 입고 칼을 차고 있었어요. 나는 돈도 주고, 옷도 주고 만주에서 허드렛 일을 하는 줄만 알았어요. 3년 계약으로 선금 480원을 받아 의붓 어머니에게 주고 왔어요. 

만주에 도착해 보니 공장이 아니라 유곽 같은 곳이었어요. 주인은 일본인 부부였고, 나를 히도미ひどみ라고 불렀어요. 

하루에 8-10명의 군인이 왔어요. 낮에는 일반 군인이 왔고 밤에는 장교들이 와서 자고 갔어요. 군인들이 주인에게 입장표를 사면 콘돔도 같이 받아 왔어요.

일본 군부대에서 군의관이 성병 검사를 했는데, 그만 큰병(성병)에 걸렸어요. 동닝东宁의 병원에 가서 10일 동안 치료를 받았어요. 퇴원해서 돌아왔는데, 내 방문 앞에 출입금지 표시를 해 두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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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에 들어간 돈도 내 몫이고, 일 못 한 돈도 빚으로 남았어요.

전쟁이 끝나고 해방이 됐지만, 고향에 마음을 붙이지 못할 것 같아 돌아가지 않았어요. 이 근처에서 중국인 남편을 만나 살았어요.

폭력이 심해 마을에서도 이혼하라고 할 정도였어요. 도저히 살 수가 없어 나중에는 혼자 경로원에 들어왔어요.

* 자신의 아이를 낳지 못한 할머니는 나이가 들수록 아이에 대한 집착이 커졌다. 정신분열증이 생기면서 아이 사진을 방에 붙여 두었다. 그리고 경로원장이 선물한 인형을 아기처럼 생각하며 얘기를 나누고, 잘 때도 안고 잤다. 

다이이치살롱 위안소의 사본

일본군 최초의 위안소 다이이치살롱(大一沙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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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상하이 둥바오싱(東寶興)로 125롱(弄)에 위치한 일본군 최초의 위안소인 '다이이치살롱(大一沙龍)'. 이 곳은 1932년 1월28일 일본군이 중국 상하이를 무장 침범한 이른바 `1.28사변' 두 달 전 상하이 홍코우취(虹口)에 음식점으로 운영하던 곳을 개조하여 군이 직접 운영한 군위안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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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 조계지였던 홍코우취를 중심으로 일본군은 상하이뿐만 아니라 그들의 군대가 이동하는 곳마다 기하급수적으로 위안소를 설치하였는데, 지금은 급격하게 진행된 도시화로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런 현실에 비해 최초 위안소 다이이치 살롱의 건물은 비교적 잘 보존된 상태였다.
이미 80년도 더 지난 건물이기에 내부는 상당히 낡고 초라했다. 빛도 잘 들지 않을뿐더러 나무로 된 복도와 계단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건물 한 채에 무려 40여 가구가 사는 이른바 쪽방촌으로 전락한 이 곳에는 이제 더 이상 80여년 전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전해들은 이야기를 다시금 전해줄 뿐이다. 이제 이곳은 사람이 아닌 당시의 상황을 고스란히 목도했던 건물들이 과거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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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정문 입구에 일본황실을 상징하는 국화문양과, 방안 창틀에 새겨진 후지산 문양이 과거 일본군이 주둔하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좁은 방들은 중일전쟁의 승리에 취한 일본군들이 술에 취해 휘청거리며 성적 욕구를 ‘배설’했던 곳이었음을 증명이나 하듯이 붉은 핏빛을 띠고 있다. 80년전 십대 소녀의 몸으로 낯설고 물설은 이곳에서 느꼈을 그녀들의 공포를 생각하니 가슴 한 켠이 한없이 먹먹해온다. 침략 야욕에 광분하여 전쟁을 일으킨 후 한반도를 병참 기지화 하고 젊은 남성들은 강제 징용을, 젊은 여성들은 위안부로 징발했던 우리역사의 아픈 상처는 이렇게 이국 땅 상하이에까지도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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