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륙 진출을 위한 교두보, 우한 위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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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5월에 쉬저우(徐州)을 점령한 후 일본군은 우한삼진(한커우, 한양, 우창) 을 향했다. 우한에는 장제스(蒋介石)의 군사 지휘부가 있었고, 사방으로 통하는 교통의 중심이기도 했다. 6월에 일본군은 셋 방향으로부터 우한에 공격을 시작했지만 중국군의 끈질긴 반격으로 고전한다. 드디어 10월말에 점령했다. 일본에서 우한작전이라고 불리는 이 싸움은 중일전쟁 중에서도 최대규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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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이 층짜리 가옥이 나란히 있는 지칭리(積慶里) 지역을 확보하여 위안소로 사용했다. 이곳은 1938년 11월부터 패전까지 사용되어 주로 일본인과 조선인 여성이 있었다. 또한 근처에 있던 육합리(六合里)라는 지역은 중국인 여성들이 피해를 받았던 장소다. 적경리는 ‘30건의 업주, 300명의 위안부 집단’을 일본군이 관리하여, ‘그 규모와 내용에 있어 중국파견군 최대’ (나가사와 켄이치, 1983, 『한코우위안소』, 62쪽) 였다고 한다.

하상숙 피해자가 처음간 곳은 우한의 지칭리이다. 골목은 쇠창살로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고, 입구에서 세 번째 집인 `삼성루`위안소에서 `기미코`이름으로 위안부 생활을 했다. 처음 군의관의 검사를 받으며 주사를 맞았는데, 그냥 아이를 못 갖게 하는 주사라고만 알려주었다. 군인들이 몰려 올 때에는 15명을 받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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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커우 일본 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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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중국에 있었던 5곳의 일본조계(天津, 重慶, 蘇州, 杭州) 중 하나로, 1937년 당시 1984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1938년 상해사변 1주년기념일에 중국정부가 회수했으나 같은 해 10월25일 한커우가 일본군에 의해 함락됨에 따라 조계가 부활하였고 1943년3월30일에 친일정권인 왕정위 정권에 반환되었다.일본 조계는 외진 곳에 위치하였고 일본상인들의 경제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크게 번영하지 않았다. 일본 은행이나 기업들은 다 영국 조계에 자리잡고 있었고 일본 조계는 밀수나 마약밀매의 중심지가 되었다.

1944년12월18일에 미군의 폭격에 의해 전체가 폐허로 변했으나 몇몇 건물은 남았다. 신사 등 2003년에 철거된 건물도 있으나 현재, 長春街1-4호의 서양건축, 옛 일본영사관(山海関路2호), 일본조계군관숙사(勝利街272호)、팔로군우한변사처(長春街57호)、한커우新四軍軍部(勝利街332-352호, 당시 지명은 大和街26호)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