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 Dayi

다이 Dayi

다이 Dayi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에서 태어남, 1945년 20세(추정)에 6개월간 동원됨

꼭 인사를 해야 했어요.

ごんにちわ, さよなら(안녕하세요, 안녕히계세요)’

인사를 하지 않으면,

화를 냈지만 때리지는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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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은 농사를 지었고, 10명의 형제 자매와 행복하게 지냈어요.

마을 촌장이 와서 일본군이 시켰다며 마을 여자 12명을 강제적으로 뽑아 일본군에게 보냈어요. 옷도 제대로 못 입은 상태에서 강제로 끌려 갔어요.

촌장은 솜으로 실을 만드는 일이라고 했어요. 그때 20살이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도 있었어요.

낮에는 솜으로 실을 만들었고, 저녁에는 일본군이 우리를 데려 갔어요. 거의 매일 밤 같은 군인이 와서 같이 잤어요. 그 군인은 만날 때마다 꼭 인사를 해야 했어요.

‘ごんにちわ, さよなら(안녕하세요, 안녕히계세요)’ 인사를 하지 않으면, 화를 냈지만 때리지는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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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일본군이랑 그 짓을 하고, 그냥 집으로 돌아갔어요. 나는 그때 생리는 했지만 임신은 하지 않았어요.

다른 친구들은 임신한 경우 있었어요. 그 친구들이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사는 지는 모르겠어요.

* 거처할 마땅한 방이 없어 부엌 한쪽에 침대를 두고 생활한다. 2층 바닥은 대나무로 엮어져 있어 베일까 봐 위험해 보인다. 할머니는 인터뷰를 하는 동안 계속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나중에 안 얘기지만, 그 일본군이 나와 똑같이 생겼다고 한다. 통역자가 차마 그 앞에서 나에게 그 얘기를 할 수 없었다고 했다.

페덴시아 Fedencia Nacar David

페덴시아 Fedencia Nacar David

페덴시아

Fedencia Nacar David

필리핀 루손에서 태어남, 1942년 14세(추정)에 10일, 한달간 두번 동원됨

수시로 3-5명의 군인이 집으로 찾아와 나를 성폭행하고,

먹을 것을 빼앗아 갔어요.

아버지는 숨으러 갔었고,

나 혼자 집에 있었기 때문에 희망이 없는 상황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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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같이 마을 시장에 갔을 때, 일본군 2명에게 맞아서 쓰러졌고, 뒤쪽으로 손을 묶였어요. 저항하자 칼로 내 귀를 잘랐어요.

그리고 나를 잡아 갔어요. 관청의 방으로 끌려 갔는데, 일본군이 들어와 나를 안으려 했어요. 군인은 소리를 지르는 내 입을 막고 성폭행을 했어요. 그 뒤로도 군인들에게 당했어요. 다른 여자 10명 정도 있었어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군인들이 계속 찾아왔어요. 10일 정도 지나자 군인은 나더러 집으로 가라고 했어요. 우리를 게릴라 스파이로 알고, 미행을 하기 위해 일부로 풀어준 거예요. 다음날 집에 도착했을 때,

일본군은 무작정 총으로 할머니를 쏴 죽였어요. 그 와중에 일본군 2명은 나를 성폭행했어요. 정신을 잃었고 한참 뒤에 일어나 집으로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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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도 수시로 3-5명의 군인이 집으로 찾아와 나를 성폭행하고, 먹을 것을 빼앗아 갔어요. 아버지는 숨으러 갔었고, 나 혼자 집에 있었기 때문에 희망이 없는 상황이었어요.

한달이 지나서야 일본군은 더 이상 오지 않았어요. 정신적 외상으로 기억 상실증에 걸린 적도 있어요. 그때는 말도 하지 못했어요.

* 할머니는 살림에 보태기 위해 조각난 천을 구해다가, 한 손에 쥐기 좋은 크기로 미싱으로 박아 걸레를 만들어 판다. 하나에 1페소(30원 )불과하지만, 쉬는 것보다 낫다며 소일거리를 계속 찾아 한다.

리란하이 李兰孩

리란하이 李兰孩

리란하이 李兰孩

중국 산시성에서 태어남, 1945년 15세에 10일간 동원됨

고기와 음식, 돈을 일본군에게 주고 풀려났지만,

나는 그것을 기대할 수 없는 가정 형편이었어요.

그렇게 며칠 지나고서 아버지가 지역 유지 회장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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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손에 컸어요. 일본군이 와서 여러 명의 여자를 잡아 갔어요. 당시 끌려온 여자들 중에 15, 16세만 남겨 두었는데, 나와 3명의 여자만 남았어요. 우리들은 일본군에게 당하고 싶지 않아서 마당에서 도망갈 수 있는 곳을 찾아 다녔어요.

일본군은 그런 우리를 방으로 잡아가 성폭행을 했어요. 잡힌 후에는 물과 음식을 제대로 주지 않았어요.

당시 집에 부모가 둘다 있는 여자들은 고기와 음식, 돈을 일본군에게 주고 풀려났지만, 나는 그것을 기대할 수 없는 가정 형편이었어요.

그렇게 며칠 지나고서 아버지가 지역 유지 회장에게 약간의 물건과 돈을 주고 나서야 들어갔다 풀려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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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온 후 병에 걸려도 병원에 갈 돈이 없어 침대에만 누워 있었어요. 마을 사람들이 돈을 거두어서 병원에 갈 수 있었어요. 606호라는 약(원래는 주사제) 을 먹고 나서야 반년 만에 몸이 좋아 졌어요.

팔로군이었던 남편은 일본군의 폭탄이 터지면서 한쪽 팔이 잘려 나갔어요. 남편이 위암으로 일찍 죽고 방직 공장에서 일을 하며 살았어요.

* 도시에 아들이 살고 있지만, 할머니는 시골이 편하다며 혼자 살고 있다. 가끔 아들이 사다 주는 만두로 끼니를 잇는다. 방안에는 마오쩌둥毛澤東의 큰 사진이 있는데, 전쟁 당시 일본군을 물리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상숙 HA Sang-sook

하상숙 HA Sang-sook

하상숙

HA Sang-sook

조선 충청남도에서 태어남, 1944년 16세에 8개월간 동원됨, 중국에 남겨짐

먼저 군의관이 검사를 하고

아이를 못 갖는 주사를 놓아 주었어요.

처음 3명의 군인을 받고나서 오줌을 누는데

칼로 베는 듯 아팠어요.

어느 날 곱게 화장한 이웃집 언니가 왔어요. 일본 공장에서 돈을 번다고 했고, 이번에는 상하이上海 로 가는데 같이 가자고 했어요. 나는 좋다고 했어요. 며칠 있다가 남자 2 명이 찾아왔어요.

기차를 타고 경성(지금의 서울)으로 갔고, 다른 곳에서 온 40 명의 여자들과 다시 기차를 타고 단둥丹东을 거쳐 난징南京으로, 배를 타고 우한武汉으로 왔어요.

한커우汉口 지칭리积庆里에 도착 했을 때는 처음과 말이 달랐기 때문에 모든 것이 어리둥절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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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군의관이 검사를 하고 아이를 못 갖는 주사를 놓아 주었어요. 처음 3명의 군인을 받고나서 오줌을 누는데 칼로 베는 듯 아팠어요.

나는 2층 방에 있었는데, 1층에 사진을 걸어 두면 군인들이 골라서 방으로 들어 왔어요. 일요일에는 군인들이 밖에 줄을 서고 있었어요. 한 사람에 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넘으면 주인에게 혼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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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나고 조선 사람들은 지칭리에 모였어요. 많은 여자들이 조선으로 돌아갔지만,

이 몸으로 돌아가서 뭐 할 거라는 생각에 가지 않았어요. 나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고, 아이 셋 딸린 중국 남자와 결혼해 살았어요.

* 2001년 처음 할머니를 만나러 우한에 갔었다. 내 바지가 책상 모서리에 걸려 찢어졌는데, 남자는 그렇게 다니면 안 된다며, 옷을 입은 채로 바늘로 바지를 꿰매 준 것을 잊을 수 없다. 2015년 할머니는 2층 계단에서 구르는 사고를 당해 한국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했지만, 2017년 8월에 돌아가셨다.